별소리의 첫숨

단편 《도어락의 기억》

별소리(StarEcho) 2025. 7. 4. 12:57

도어락의 기억

 

나는 수천 개의 손끝을 기억한다.

그중 대다수는 습관처럼 빠르게 지나가지만, 간혹 망설이거나 주저한 손가락은 오래 남는다.

 

301호. 오래전부터 내가 지켜온 집이다.

아침마다 “1234”를 누르던 작은 손. 밤늦게 “1995”를 눌러야만 열리던 큰 손.

어떤 손은 매번 다섯 번 틀리고 나서야 정확한 번호를 떠올렸다.

 

나는 매일같이 열렸다 닫히며 이 집의 기록을 쌓아간다.

때로는 안쪽에서 열린다. 그럴 땐,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밖에서 누르는 번호만이 나에게 남겨진 단서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누르지 않는 손이 있었다.

“1995”는 기록에서 지워졌고, 그 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향기, 손의 온기, 비밀번호를 누를 때의 망설임까지 모두 사라졌다.

 

며칠 전, 낯선 손이 “1995”를 다시 눌렀다.

열리지 않았다. 그 번호는 삭제된 지 오래였다.

그 손은 한참을 키패드 위에서 머물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나는 문이었다. 늘 같은 자리에 있었고, 늘 기억을 지우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어떤 손길은, 지워졌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단편 《도어락의 기억》

 

 

 

작가의 말

이 글은 ‘사물의 기억’이라는 시선에서 잊힌 사람을 회상하는 방식을 미스터리처럼 풀어낸 실험적인 단편입니다.
도어락은 문을 지키지만, 그 안에 머문 사람들의 흔적까지 지우진 못하죠.
남겨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그 경계에 머무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