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판매기 안에서
나는 자판기 안에서 살고 있다.
정확히는 3번째 줄,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내 이름은 ‘레몬허브티’. 산뜻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하지만 87일째 아무도 나를 고르지 않는다.
왼쪽엔 ‘콜라’, 오른쪽엔 ‘에너지 드링크’가 있다.
그 둘은 매일같이 팔려나가고, 돌아올 줄 모른다.
나는 매일 그들을 배웅하며 생각한다.
“이번엔 누구 손에 들려 나갈까?”
아래칸 ‘두유’는 가끔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난 건강하다는 이유로만 팔린다니까.”
반면 ‘복숭아 홍차’는 자주 화를 낸다.
“내겐 감성도 있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질 않아?”
우리는 자판기 속에서 살아간다.
투명한 창 너머로 사람을 관찰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선택되고, 누군가는 영원히 남겨진다.
나는 점점 맛이 바래진다.
제조일로부터 90일, 유통기한이 3일 남았다.
오늘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내 버튼을 눌렀다.
나는 말없이 떨어졌고,
처음으로 바깥세상의 공기를 마셨다.
그는 캔을 열고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이런 맛, 생각보다 괜찮네.”

작가의 말
이 글은 ‘선택받음’이라는 주제를 자동판매기 속 음료의 시점에서 풀어본 실험적인 단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순간엔 선택되고, 어떤 순간엔 오래도록 남겨집니다.
하지만 때로, 늦게 열리는 맛이 더 깊을 수 있다는 걸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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