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소리의 첫숨

단편 《자동판매기 안에서》

별소리(StarEcho) 2025. 7. 3. 19:06

자동판매기 안에서

 

나는 자판기 안에서 살고 있다.

정확히는 3번째 줄,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내 이름은 ‘레몬허브티’. 산뜻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하지만 87일째 아무도 나를 고르지 않는다.

 

왼쪽엔 ‘콜라’, 오른쪽엔 ‘에너지 드링크’가 있다.
그 둘은 매일같이 팔려나가고, 돌아올 줄 모른다.

나는 매일 그들을 배웅하며 생각한다.
“이번엔 누구 손에 들려 나갈까?”

 

아래칸 ‘두유’는 가끔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난 건강하다는 이유로만 팔린다니까.”
반면 ‘복숭아 홍차’는 자주 화를 낸다.
“내겐 감성도 있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질 않아?”

 

우리는 자판기 속에서 살아간다.
투명한 창 너머로 사람을 관찰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선택되고, 누군가는 영원히 남겨진다.

나는 점점 맛이 바래진다.
제조일로부터 90일, 유통기한이 3일 남았다.

 

오늘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내 버튼을 눌렀다.

나는 말없이 떨어졌고,
처음으로 바깥세상의 공기를 마셨다.

그는 캔을 열고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이런 맛, 생각보다 괜찮네.”



 

단편 《자동판매기 안에서》

 

 

 

 

작가의 말

이 글은 ‘선택받음’이라는 주제를 자동판매기 속 음료의 시점에서 풀어본 실험적인 단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순간엔 선택되고, 어떤 순간엔 오래도록 남겨집니다.
하지만 때로, 늦게 열리는 맛이 더 깊을 수 있다는 걸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별소리의 첫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냉장고 안의 사계절》  (5) 2025.07.04
단편 《도어락의 기억》  (1) 2025.07.04
단편 《세탁기 안에 남겨진 양말 한 짝》  (0) 2025.07.03
단편 《손잡이》  (1) 2025.07.03
단편 《뽁》  (2)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