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냄비 받침이고, 그 아이는 요리책이었다
나는 냄비 받침이다.
뜨거운 걸 받치는 게 내 일이자 자부심이다.
솥뚜껑이든 주전자든
펄펄 끓는 냄비든
다 나한테 맡기면 식탁은 안전하다.
그러니까,
그날도 평소처럼
뜨끈한 된장찌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툭”
내 자리 위에 누가 납작하게 드러눕는 게 아닌가.
요리책이었다.
'이것은 한 그릇의 기적'
사진 자알 빠졌고,
종이 질감 고급이고,
사람 손이 자주 간다.
게다가 그날은
완전히 내 자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어라? 냄비는?”
“아, 그냥 책 위에 잠깐 놓자.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니, 안 괜찮거든요!"
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나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서 살짝 미끄러졌다.
요리책이 내 쪽을 흘긋 보더니 느긋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된장찌개는 마지막에 두부를 넣고 마무리합니다.'
잘난 척도 정도껏 해야지.
나는 되도록 얇고 조용히 살았지만, 이건 선 넘었다.
요리책은 점점 영역을 확장했다.
국물 살짝 튄 자국도 무슨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품고,
테이블 한복판을 아예 자기 집처럼 점령했다.
나는 점점 식탁 끝으로 밀려났다.
가끔은 식기 아래 깔려 있고,
어쩔 땐 물티슈 통 밑에 깔려 있었다.
“이럴 거면 나 왜 만든 거냐…”
그러던 어느 날.
된장찌개 냄비가 그 요리책 위에 얹혔다.
기름 묻고,
국물 흘러내리고,
뚜껑까지 딱 닫히면서
요리책, 그대로 눅눅하게 눌렸다.
표지는 휘고,
속지는 달라붙었다.
나는 그걸 보고
말없이 웃었다.
다시 내 위로
뜨거운 냄비가 올라왔다.
“역시 이건 냄비 받침이지~”
주인님이 말하며 내 등을 톡톡 쳤다.
그날 이후
요리책은 자리를 비켜줬다.
이젠 옆에서 조용히 펼쳐지고,
나는 다시 당당히 중심을 지킨다.
그래도 가끔은
그 애의 조언이 없으면
된장찌개 간이 좀 아쉽긴 하다.
그래.
넌 읽고,
나는 받치자.
우리는 겹치지 않는 쪽이 서로에게 좋다.
작가의 말
가끔은 역할이 분명한데도 누군가 내 자리를 슬쩍 차지하려 할 때가 있죠.
그럴 땐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딱 맞는 자리는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냄비 받침처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온 당신,
오늘도 아주 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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